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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수행은 어떻게? (5 - 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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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광제 작성일13-04-08 15:13 조회5,633회 댓글1건

본문

생활 속의 수행

 

 

-우리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자신이 하는 수행을 하면, 생활이 가벼워지고 힘들고 짜증나는 일도 쉽게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일념으로 수행해 나가다보면, 밥을 먹든, 일을 하든, 대화를 하든 잠을 자든, 어디에서나 수행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렷한 상태가 지속되는 성성(惺惺)과 우리 의식에서 잡념, 망상이 사라진 상태인 적적(寂寂)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든 불교 수행의 삼매는 이 성성적적(惺惺寂寂). 적적성성(寂寂惺惺), 삼매
입니다.

 

-24시간 가운데 자신이 활동할 때에도, 꿈에도, 숙면에 들어서도 수행이 일념이 되어 끊임없이 이어져(오매일여. 寤寐一如 :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다"), 삼매에 이르면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인연이 닿으면 바람소리, 돌을 던지는 소리, 혹은 상갓집 상주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깨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을을 지나다 한낮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침.-서산대사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닫다.-원효 스님
큰 구렁이를 본 순간 깨닫다.-부휴 선사
손가락 하나를 세우는 모습에서 깨닫다.-구지 선사
다리를 건너다 물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깨닫다.- 동산 양개 스님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딱하는 소리에 깨닫다.-향엄 스님
찻잔을 받으려 하다가 깨침.-백우 스님

옆 방 사람이 중얼거리는 말 소리에 깨침.-의현 스님.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조차 없다는 말을 듣고 깨침.-경허 스님.

 

-우리가 생활 속에서도 수행을 지속적으로 해가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매우 지혜로운 생각이 문득 문득 일어납니.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을 직면해도 당황하지 않고 순간순간 통찰력이 생겨 지혜로운 해법을 찾게 됩니다.

 

골치 아프고 피하고 싶은 그런 상황도 밝은 마음으로 마주하여 당당하게 해법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생활 속의 수행을 하다보면 일상생활을 자유자재하며 활발발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체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경지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잘못하면 그 반대의 현상도 생깁니다. 즉, 고요하고 번뇌망상도 없는 상태를 적적삼매(寂寂三昧)라 하는데, 이 적적삼매를 바른 공부로 착각하여 수행을 하면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상을 싫어하고 고요하고 조용한 곳을 집착하게 됩니다. 고요하고 아늑한 경지를 느껴 그 자리에 자꾸 자꾸 집착하는 것을 적적삼매, 즉 무기(無記)라 합니다.

 

무기(無記)는 우리 의식이 마냥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 무기, 적적삼매에 빠지면 일상생활을 등한시하고 자꾸 그 자리에 집착하여 적적 공부에 얽매이게 됩니다.

 

이런 공부에 빠진 분은 가정과 직장 생활에서 맞이하는 자기 역할과 책임을 외면하고 매우 소극적인 사람으로 되어 갑니다. 가장은 가장의 역할이 있고 살림을 맡아 사는 주부는 주부의 역할이 있는데, 그 역할과 책임을 소홀히하고 미루면 가정에서 불화와 갈등이 일어납니다. 직장과 가정에는 복잡한 인간관계와 일이 많습니다.

 

적적삼매에 빠진 사람은 현실의 복잡하고 어려운 일과 관계는 피하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 고요하고 편안한 자리를 체험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집착하면 다른 번잡한 일은 싫어 집니다. 그래서 이런 공부에 빠진 사람은 가정과 직장을 소홀히 히고 무능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또 허무주의적인 삶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우리 삶은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피하여 절이나 깊은 산속을 동경하며 그곳이 공부하기가 좋은 곳이라 집착합니다. 이렇게 적적만 하는 수행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수행은 매우 위험합니다. 우리는 이런 적적삼매의 외도(外道)수행을 해서는 안 됩니다.

 

-바른 수행은 생활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나아가 생활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불교 수행은 깨달음을 향해 가는 길이면서 동시에 생활을 바르게 잘 하는 길입니다.

 

특히, 재가 생활인은 직장이나 가정 생활 그대로가 수행입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인간관계나 업무를 무아공심(無我公心)로 바르게 해결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반대로 직장과 가정에서 사심(邪心), 즉 이기적인 마음으로 일처리나 인간관계를 하게 되면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괴로움을 낳거나 장애를 만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절에 가서 참선을 하거나, 염불, 주력, 절, 기도하는 것 만이 아니라, 일상생활 그대로가 수행이 되는 것입니다.


즉,
무아공심으(無我公心)로 나와 남을 모두 잘 되게 하는 바른 마음으로 직장과 가정 생활을 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 등 모든 사람 관계에서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도와주는 말과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무한경쟁시대로 지구촌이 하나가 되면서 세계 일류만이 살아 남을 수 있다며 경쟁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잇는 현실에서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자세는 바보라는 핀잔을 받기가 쉽고, 스스로 혼돈에 빠지거나 퇴굴심(退屈心)이 생겨 신심이 떨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매일 규칙적으로 수행을 생활화하면, 이런 어려운 경계(역경계)를 만나더라도 정진력으로 능히 극복해 나갈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 재가 수행자들이 수행을 생활화하는 이유는 바로 가정과 직장 생활을 바르게 잘 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수행을 위한 수행은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맡은 책임을 다하여 나와 남이 모두 잘 되고 행복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지, 수행에 집착하여 무능하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참선, 염불, 주력, 기도, 위빠사나,명상 등 수행을 하루 규칙적으로 생활화하면 우리의 뇌에 도파민과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 물질이 분비되어 긍정적인 사고와 행복감을 높여 준다고 합니다.

 

불교 수행을 생활화 한 많은 분들이 지혜와 자비심, 그리고 인격을 향상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상 생활 그대로가 수행이고, 수행이 일상 생활을 떠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활 속의 수행은 삶과 함께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생활화. 사회화는 양변을 여윈 정견의 생활화를 말하는 것이바, 일상 생활에서 수행을 통해 번뇌망상을 다스리고 양변을 여의어 본래 부처로 살아 갈 것을 안내합니다. 이러한 삶을 일러 ‘나날이 좋은 날’, ‘모든 일이 좋은 일의 경지‘라 합니다.

 

이러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은,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어려운 이웃과 괴로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을 삶의 기쁨이자 보람으로 여깁니다.
 

남을 돕는 것이 바로 자기를 돕는다‘는 생각으로 모든 이들을 부처님으로 보고 존중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를 가져,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야 합니다.

 

-수행을 지속적으로 해 나가다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밝아지며, 경계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알 수가 있고, 그렇게 일념으로 해 나가다보면 정신이 통일되어 잡념이나 망상이 없어집니다.


더 나아가서는 잠재의식(아뢰야
식)까지 없어지게 되어, 어느 날 인연이 도래하면 홀연히 깨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自己를 바로 봅시다.

自己는 원래 救援되어 있습니다.

自己가 본래 부처입니다.

自己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自己를 바로봅시다.

自己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自己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自己를 바로 봅시다.

有形. 無形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自己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自己입니다.


自己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自己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自己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바다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自己를 바로 봅시다.

自己는 영원하므로 終末이 없습니다.

自己를 모르는 사람은 世上의 終末을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自己를 바로 봅시다.自己는 본래 순금입니다.

慾心이 마음의 눈을 가리워서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을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慾心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自己를 바로 봅니다.


自己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相對라도

그것은 겉보기일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 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相對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相對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自己를 바로 봅시다.

현대물질만능에 휘말리어 自己를 喪失하고 있습니다.

自己는 큰 바다와 같고 物質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다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自己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救援)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救援)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 큰 진리속에서 살고 있는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1982년 부처님오신날 성철스님 범어>

 


 

          성철스님의 임종게(臨終偈)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들을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치고

 

중생이 본래 부처인데 교화하는 노력(법문,삼천배와 아비라 기도를 시킨 것 등)의 방편을 썻으므로, 그것이 성철스님 스스로 허물이 크다는 의미.

 

육조단경에 혜능대사께서, 「나는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하시니까, 신회스님이 「큰스님께서는 어째서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십니까?」하고 여쭈었다. 대사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본다고 하는 것은 항상 나의 허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허물과 죄를 보지 않는 것이다. 그 까닭에 보기도 하고 보지 않기도 하느니라.」

 

여기서, 깨달은 도인은 자기 허물이 없는데, 왜 자기 허물을 본다고 했을까?

 

그것은, 본래 부처인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설법과 노력을 자신의 허물로 보는 것이다.

 

허물이 많은 중생인데, 왜 보지 않는다고 했을까?

 

중생도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허물을 보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즉, 변견에 치우침이 없이 중도로써 만인. 만 생명이 절대 평등하다는 것을
표현 한 것이다.

 

‘수행하라. 깨달아라’ 하는 것은

중생도 본래 부처인데 멀쩡한 맨살을 긁어

부스럼을 내는 것과 같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도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데

 

성철스님 자신의 허물로 본것이라는 의미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다.

 

진리 그 자체를 표현. 즉 우주 만물의 존재 원리를 나타내는 의미

 

 

☞ 성철스님의 임종게에 대해서, 타 종교에서는 이를 성철스님이 무간지옥에 떨어졌다고 시인했다 하면서, 공격을 많이 하기도 합니다. 참 의미를 모르니, 밖으로 나타난 문자의 표현 만 가지고 해석을 하는 어리석은 누를 범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은, ‘나와 우주 만물의 존재원리인 중도와 연기’를 깨달으셨는데, 이 세상은 모든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에 의해 생성되고, 소멸되는 연기의 세계이므로, 따라서, 만인. 만생명이 차별이 없는 절대 평등한 중도의 세계라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살아갈 때 본래
청정한
마음을 찾아가며, 그리고 모든 중생을 이롭게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여 지금. 현재의 세상을 보다
평화롭고 살기좋은 불국토(佛國土)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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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限向上의 길'


"우리 자신이 본래 부처이고, 현실이 바로 극락이라는 정견으로 생활에서
수행을 일치시켜 나날이 좋은 날을 만들어갑니다."

-매일 규칙적으로 수행을 한다.
-한달에 한 번 이상 선지식의 법문을 듣고 신심.발심을
 점검한다.
-1년에 한 번 이상 1박2일 수련회에 참가하여 정진력을
  키운다
-올바른 수행이 되고 있는지 선지식께 중간 중간 점검
  을 받는다.
-경전강의에 참석하고, 스스로의 학습은 다음의 책들
 을  참고하여 공부해
나간다.

*불교입문(조계종출판사; 불교에 갓 입문한 분의 경우)
*불교의 이해와 신행(조계종출판사)
*자기를 바로 봅시다(성철스님)
*영원한 자유(성철스님)
*백일법문(성철스님)



 

<중도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시거나, 참선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의
참고 서적>


*간화선-조계종 수행의 길(조계종출판사)
*돈황본 육조단경(성철스님 역. 장경각)
*돈오입도요문 강설(대주혜혜. 성철스님 역. 장경각)
*신심명.증도가 강설(성철스님 역. 장경각)
*서장(대혜종고. 전재강 역.운주사)
*선요(고봉원묘.전재강 역.운주사)
 
*기타 경전과 선어록
*인터넷에 '삼영불교음반'사이트에 들어가면 경전강의.
  CD,MP3.TAPE를
판매하고 있으니, 이것도 참조하시
  면  될 것같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조계사 선림원의 '참선입문' 과정
 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참고로 하여 올렸습니다.



끝으로, 제가 이전에 수도암 카페에 올린 글애 대해 원덕스님께서 중도와 연기 대해 가르침을 주신 내용을 올려봅니다.

 

 

 

원덕스님 :

 

도림道林 법전法傳스님 (조계종 제 11대, 12대 종정역임. 현 해인사 방장)의 상좌. 태백산 도솔암 15년 수행. 팔공산 도림사 전 주지. 포천 법왕사 전 주지. 김천 수도암 주지로 계시다가 지난
2013년 3월 20일 주지소임을 내려놓고 정진하기 위해 포항 죽장면의 '달마선원' 토굴로 내려 가셨습니다.

 

원덕스님은 태백산 도솔암에서 15년 동안(1985년 10월 14일
가을에 입산 ~ 1999년 가을에 완전 철수)
생사를 건 수행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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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스님 / 달마선원]

 


중도中道와 연기緣起를 보는 관점觀點은,



학자學者가 학문과 지식으로 보는 관점이 있고,


수행자가 직접 수행을 하여 터득하여 보는 관점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같은 수행자修行者라해도 연기와 중도를 보는데 있어서
수행의 정도에 따라 틀린 것입니
.


다시 말하면 진리와 현실의 당체當體(실상과 현상)는 하나이고 변함이 없지만,
중도와 연기를, 이해는 하지만, 보는 사람 따라 실상과
현상을 보는 능력은 틀린 것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어서 연기이고,
양변을
초월한 것이 중도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러나 중도와 연기를 역설적逆說的으로 말하면,


그것은 이쪽에도 없고 저쪽에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안으로는 손바닥과 손등(실상과현상) 의 양면을 동시에 절대로 볼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중도는 손바닥과 손등의 양면을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좀 더 말하면 동시에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2연기를 볼 때,
무명이 있음으로 행이 있고 행이 있음으로 식이······· 유가 있으므로 생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다.


공空을 볼 때,
우리의 육신이(또는 일체의 모든 것이) 지수화풍 4대로 흩어져 각기 원소로 돌아가고 보이지 않으니 공空이다.


이런 방식方式으로 연기와 중도와 공을 이해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12연기를 모르고 고집멸도를 모르고 8정도를 모르는 불자는 없습니다.


문제는
12연기와 고집멸도 그리고 8정도 (또한 이 세상 모든 것 이)가 그 자체自體가 공空이고 중도中道이고 연기緣起인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여문과 생멸문은 하나인 것입니다.


수행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정법을 열심히 하게 되면 궁극에는,
의학적인 신경이 아닌, 의식意識의 신경神經이 모두 끊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일체를 모르게되는데,


이것을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신경이 살아나는데,

5근根(안이비설신)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육식六識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칠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
8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지혜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멸寂滅(실상)과 지혜智慧(현상)를 함께 공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도, 공, 연기,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참으로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인것입니다.

 


[광제]



 스님의 귀하신 가르침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이 중도와 연기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실제 수행을 통해 체험 한 것과, 그리고,
수행자의 수행력의 차이에 따라, 실상과 현상을 보는 능력의 차이는 상당한 것임을, 불자님들은 스님의 글을 읽고 느꼈으리라 생각듭니다.


그래서, 스님들 뿐만 아니라, 재가자들도 선지식께 정법을 올바르게 지도받고, 점검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봅니다.


혼자서 그냥 공부하다보면, 수행 중에 여러 현상이 나타날때, 이를 공부가 잘 되는거로 착각 하여, 삿된 수행으로 나아가기도 하므로, 수행력이 높은 선지식의 지도가 더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해봅니다.


_()_()_()_



 

<끝>

댓글목록

유경섭님의 댓글

유경섭 작성일

나  를  찿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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